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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여행 생활

【영월 여행】마차 '탄광문화촌' 그땐 그랬지...

by ( ˃ ⩌˂) ◖⚆ᴥ⚆◗ 2023. 9. 17.

【영월 여행】 마차 탄광문화촌... 추억 그 이상의 선물

지난 한반도 지형 선암마을, 선돌, 그리고 청령포에 이어

오늘은 탄광문화촌과 마차리에 대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탄광문화촌은 단순히 볼거리를 제공하는 곳 보다는 당시 시대상을 보여주는 곳으로 탄광에서 나고 자라신 어르신들이 좋아하시는 곳이며, 특히 추억을 떠올리며 마냥 즐거워하시기 보다는 예전 힘들고 어려웠던 그 시절을 생각하며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끼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탄광촌에 대한 옛 이야기들을 많이 해보려고 합니다.  

 

 

영월군 북면 마차리, 탄광문화촌 

영월군 북면 마차리라는 동네는 역사적으로 귀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동안 일제 강점기에 있던 우리나라는 곳곳에서 일제의 수탈과 억압 그리고 많은 상처의 자국들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치하 영향으로 삶의 형태가 급격히 바뀐 모습을 보이는 곳도 있는데, 바로 오늘 소개해드리는탄광문화촌이 있는 마차리가 대표적입니다.

 

 

마차리는 1935년 일제가 세운 강원도 최초의 탄광, 영월광업소 마차탄광이 있던 곳입니다.

(제천에서 38번 국도 ▶ 연당 ▶ 영월삼거리 ▶ 문곡 삼거리 ▶ 마차에 도착을 하게 됩니다.)

마차 탄광

1935년 영월 북면 마차리에 강원도 내에서 가장 먼저 탄광촌이 형성됩니다.

당시 숙련노동자들이 필요했는데, 평양탄광에서 일하던 노동자들, 그리고 중국 산동지역 출신의 광부들 800여명이 함께 투입되어 탄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만주의 푸순 탄광, 평양 탄전, 일본 탄광 등 기술자들이 들어오면서 당시의 마차리는 국제탄광촌이 되고 생산된 석탄은 영월에 조선전력회사 영월발전소로  공급을 했습니다. 또한 강원도 고한, 사북, 도계 등 탄광이 개발되는데 그 원조의 역할도 하게 되는 중요한 곳이 바로 마차 탄광입니다.

탄광
탄광

1960~70년대 우리나나는 석탄산업 최고 호황기입니다.

1958년 이승만 대통령, 1962년 박정희 대통령, 1980년에는 전두환 대통령이 다녀갈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산업과 경제 발전에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했던 곳이 바로 마차 탄광입니다.

 

"진부기생 배꼽엔 톱밥이 끼고, 마차기생 배꼽에는 탄가루가 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당시 마차리는 탄광촌으로 매우 유명했고 그 규모도 상당했었습니다.

 

이후 차차 얘기하겠지만, 당시의 시설과 건물 그리고 탄광의 흔적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이후 2010년대 중후반에 마차를 탄광문화촌으로 관광마케팅을 하고 있지만, 당시의 시설과 건축물들은 볼수 없어 개인적으로 많은 아쉬움이 있는 곳입니다. 

 

 

♣ 마차 초등학교

마차 여행을 할 때 잠깐 들리면 좋을 곳이 마차 초등학교입니다.

마차 초등학교는 주민들을 위한 각종 문화행사와, 체험학습 그리고 각 분교의 순회수업 등으로 폐교를 막기 위해 여러 노력을 하고 있지만, 줄어드는 아이들 숫자를 막을 방법은 없어 고심하고 있는 곳입니다.

 

초등학교 한편에는 탱크와 장갑차가 전시되어 있는데... 

다른 곳도 아니고 학교 앞에 탱크와 장갑차라... 분명 어떤 뜻과 의미는 있을 텐데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반대편으로는 마차 중학교와 마차 고등학교가 있는데, 고등학교는 폐교가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인조잔디의 풋살장, 학교 내 정원과 공원 그리고 무엇보다 자연샘이 흐르는데 여름에 캠핑이나 아이들 체험학습으로 최적의 조건을 갖춘 시설이 되었습니다.

 

호수
학교 건물
초등학교
학교 샘

더운 여름에는 동네 주민들도 학교를 찾아 샘에 발을 담그기도 합니다.

이 샘은 현지식 표현으로 골물이라고도 합니다. 어디서 샘솟는지 정확히 알지를 못하고, 깊은 산속 골에서 물이 나온다 하여 골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강원도에는 이런 산속 골물 들이 여러곳에 있어 1급수 흐르는 물에서만 사는 송어 양식이 가능하여 주천, 영월, 평창, 정선 등,,, 송여 양식장 및 회를 맛볼 수 있는 식당 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다음은 마차 동네의 모습입니다.

마차 전경

 

현재의 마차리는 노인들이 대부분이며, 일자리가 없어 젊은 층들은 대부분 도시로 떠났고,

아이 울음소리가 들린지 꽤 오래된,,, 지금은 2천명 정도 남짓의 작은 시골 마을이 되었습니다. 

 

예전 80년도 초까지만 하더라도 영월 인구의 절반이 마차에 거주할 만큼 큰 규모의 동네였습니다. 초등학교에는 병설유치원도 있었고, 지금으로 비교하면 어린이집인 마차 유아원이 있었는데 40~50명의 원생 규모로 오랫동안 유지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마차 초,중,고등학교 연합으로 총 동문회를 하는데... 생각보다 규모를 크게합니다.

 

마차

 

마차리는 마을을 탄광문화촌으로 재구성하면서 많은 곳들이 바뀌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많이 아쉬운부분입니다.

 

실제로 재구성하기 전에는 마을 곳곳에 예전의 시대상과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건물과 도로, 골목 등이 있었는데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했습니다. 일제 시대에 지어졌던 건물, 사택, 공용화장실 등 많은 시대상과 역사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보존할 부분과 재개발할 부분을 구분하여 관광화 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벽화 또한 탄광문화촌 개발을 고려하여 계획적으로 했으면 좋으련만, 시간이 흐르며 담당 공무원이 여럿 바뀌는 과정에서 그때 그때 실적만을 위해 대충 진행한 것처럼 보여, 개인적으로 마차리의 문화관광 마케팅에 대한 점수를 후하게 주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마이너스... 

 

 

마차는 석탄광업공사 교육본부가 있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마차에서 요봉을 가는 사이에 밤치라고 있는데 그 밑에 광부들을 모집하고 교육소가 있었고, 교육을 마친 광부들은 솔치 탄광과 밤치 탄광에 배치되어 일을 했었습니다.

 

♣ 솔치 탄광 가는 길 

솔치

탄광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을 드리면, 마차리 자체에 탄광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솔치와 밤치에 있는데, 솔치는 마차에서 솔치 골을 향해 4km를 거슬로 올라가야 탄광이 있습니다.

 

솔치골은 사진으로 보다시피 산이 높아 오후 3시면 해가 넘어가는 동네입니다.

지금은 5~6가구 정도 남아 산속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시지만, 탄광이 활성화 되었던 당시만 하더라도 200~300가구가 넘는 꽤 큰 시골 마을이었고, 학교도 있던 곳입니다.

 

광산 버스가 솔치에서부터 마차와 공기, 요봉까지 수시로 오가며 광부를 태워 날랐고, 광산에서 발생하는 경제의 효과로 상권이 발달하고, 광부들이 모여들고 정착하며 살았던 곳이 마차입니다.

 

몰려드는 광부를 위해 석탄공사와 일제 관료측에서 사택을 지어 제공했는데, 마차에서 솔치골로 진입하는 초입에 대규모 사택 단지가 있었습니다.

 

일제 해방을 시대 배경으로한 드라마나 영화에도 자주 등장했던 곳으로 거기가 탄광문화촌 자리로 딱인데, 거길 밀어버리고 다른지역들의 관광을 벤치마킹하여 메밀을 심어 메일꽃 축제, 유채를 심어 유채꽃 축제와 같은 말도 안되는 짓들을 했었고, 지금은 그냥 비어있는 땅으로 알고 있습니다.

 

 

탄광문화촌... 그땐 그랬지!

당시의 정취와 시대상을 느낄 수 있도록 재구성한 곳이 바로 탄광문화촌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정확한 부분은 아니지만, 영월에서 박물관의 도시라는 관광 마케팅을 진행하면서 탄광문화촌도 탄광박물관으로 시작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차를 탄광문화촌으로 관광단지로 재 조정을 하면서 탄광박물관역시 시설을 늘리고 확장하면서 탄광문화촌으로 자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탄광문화촌
탄광문화촌
탄광문화촌
탄광문화촌
탄광문화촌

 

당시 마차를 중심으로 발달했던 상권 그리고 동네 주민들의 생활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탄광
탄광
마차상회
광부
탄광촌
탄광촌
탄광촌
탄광촌

학교에 있던 나무 책상, 그리고 도시락은 철재 도시락에 물을 살짝 붙고, 난로에 올려놓았다 비벼 먹으면 정말 맛있었습니다. 맨 밑에 깔린 도시락은 위에 쌓인 도시락들 때문에 뒤집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물을 조금이라도 꼭 부어야 했고, 운이 없는 날에는 탄밥을 비벼 먹기도 했었지요..  

 

 

그리고 탄광촌 한쪽에는 산업전사 위령탑이 있습니다.

탄광은 갱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목숨을 담보로하는 직업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석탄 산업이 한창일 때 전국 여러 곳에서 갱이 무너저 사람이 갇히고 죽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구출하는 일에 막대한 비용이 소모되기에 알고도서 모른척 덮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또한 광부들은 호흡할 때 들이마시는 석탄가루가 폐에 붙어 염증이 생기고 폐 조직이 섬유화되는 진폐증을 겪었습니다. 오랫동안 광부로 일하신 분들이 증상이 더욱 심했고, 대부분 병원에서 진폐증을 앓다가 돌아가십니다. 특히 호흡이 힘든 상태로 평생을 살다 생을 마감했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요...

 

추모비
추모비

 

탄광문화촌의 규모와 볼거리가 그리 큰 것은 아니지만,,,

꽤 디테일하게 재현을 해놨습니다.

 

마차탄광촌을 여행하실 때에는 꼭 연세가 있으신 부모님을 모시고 오세요.

어린아이들과 젊은 분들에게는 그저 볼거리에 지나지 않겠지만, 어르신들에게는 다르게 보일 겁니다.

 

저 시대상을 경험하고 자라오신 어르신들에게는

추억 그 이상의 뭉클함과 옛 생각에 반가운 눈물을 선물로 드리는 시간이 되실 겁니다.

 

탄광에 대해 더 할말은 많지만,,,, 언제나 그렇듯 

저의 생각보다 블로그가 길어져 웰컴투 동막골은 다음 포스팅에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공감 꾸욱  감사합니다. ^^